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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해머 소설 번역/라그나르 블랙메인 Ragnar Blackmane

결투, 그리고 다크엔젤의 경고

by 맥주수염 2020. 12. 17.

 

 

 아바돈이 일으킨 13차 블랙 크루세이드 중 카디아에서 전투를 이어가던 야를* 라그나르 블랙메인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조언자인 슬레이어 울릭에게서 한 가지 질문을 듣게 된다.

*야를Jarl: 스페이스울프의 중대장, 다른 말로 울프로드가 있다

 

 '지금껏 곁에서 싸워왔던 이들 중 가장 안타까웠던 이가 누구였는지요.'

 

 이에 라그나르는.

 

 '냘피르, 냘피르 레이저텅. 그를 잃은 것이 가장 슬프고 안타까워, 영감... 그의 독설은 별로 그립진 않지만.'

 

 라는 대답과 함께 40년 전, 치기 어린 블러드 클로였던 그가 이제 갓 울프가드가 되었을 때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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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조.

 분노의 홍조, 얕고 수치스러운 고통의 홍조, 그의 핏발 선 눈가의 홍조.

 

 목소리들.

 형제들의 목소리, 적들의 목소리, 그의 곁에서 싸운 이들의 목소리와 그의 죽음을 바라는 이들의 목소리.

 

 ‘블랙메인?’

 ‘형제여?’

 ‘그를 일으켜!’

 ‘사격중지!’

 ‘말만 하십쇼, 슬레이어. 저놈들을 찢어버릴테니!’

 ‘이 위반행위는 잊지 않을 것이다’

 ‘용서도 없을테고.’

 ‘제기랄, 그를 일으키라니까!’

 ‘피는 피를 부르는 법.’

 ‘그 망할 방아쇠에서 손 떼!’

 ‘사격중지! 먼저 쏘기 전까진 사격하지 마라!’

 

 이 상반된 목소리의 폭풍 속에서, 라그나르는 정신을 차렸다.

 ‘끝났다.’ 모여있는 양 챕터의 전사들에게 그가 말했다. 베레겔트(군함 이름)의 격납고 안에서 대치하고 있는 양측 사이로 침묵이 찾아왔다.

 

 그의 앞엔 다크엔젤들이 서 있었다. 그 수는 육십 명 정도로, 그들 개개인은 전쟁으로 얼룩지긴 했지만 파괴된 그들의 모성 속 깊은 숲과 같은 색으로 주조된 갑주를 입고 있었다. 다크엔젤들은 분대별로 질서정연한 대열을 갖춘 채, 표식을 달고 그들의 자랑스러운 기수들이 세운 기준 아래 도열해 있었다.

 하얀 백의와 로브는 최근의 전투로 지저분했고, 군데군데 그을려 있었으며, 다른 부위에는 피가 튀어있었는데 그들의 무기는 모두 라그나르를 직접적으로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그의 형제 늑대들이 있었다. 서른 정도가 라그나르의 군기 아래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야를 베렉이 마엘스트롬의 가장자리 전투를 위해 라그나르를 배틀리더로 지명한 후부터 그를 따르고 있었다.

 

 ‘베레겔트 호를 가져가라.’ 몇 달 전 기함인 홀름강에 오르며 울프로드가 그리 말했었다. ‘중대 팩(pack) 중 삼분지 일을 차출해주지. 내게 승리를 안겨줘, 블랙메인.’

 

 다크 엔젤의 냉담함에도 불구하고, 힘겨운 싸움이긴 했지만 어쨌든 정직하게 얻어낸 승리였다.

 그러나 지금 체인소드는 빈손으로 불꽃을 튀기며 부름을 절실히 기다리고 있었다. 라그나르는 그의 부츠 옆의 시체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곳엔 챔피언이 쓰러져있었고, 그의 어깨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크 엔젤의 머리는, 여전히 헬멧을 쓴 채로, 십여 미터 떨어진 갑판 위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프로스트팽의 이빨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끝이야.’ 라그나르가 다시 말했다. ‘결투는 끝났어.’

 

 이 선언에 오직 침묵만이 답했다. 심지어 다크엔젤 함선의 도킹을 위한 격납고의 사이보그 노예들조차 미동도 없이 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얼굴에 부딪힌 일격으로 인해 볼이 찢겨 뼈까지 드러났었으나, 그의 피는 진즉에 따끔한 통증을 주는 재-여과된 공기 속에서 응고되어 있었다. 상대적으로 깨끗한 상처가 그 순간을 더 악화시켰다. 분노와 수치심의 순간적인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그는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라그나르는 발치의 시체에 손짓을 했다. ‘사자死者를 데려가라.’ 다크 엔젤의 대형에 대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의 배에서 내려라.’

 

 여섯 명의 스페이스 마린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 중 네 명은 말없이 경건한 태도로 시신을 들어 올려 대열로 옮겼다. 또 다른 이는 수도승들이 그러하듯, 존경을 담아 잘려진 머리를 챙겼다.

 이들, 다크 엔젤들에겐 캡틴이 없었다. 그는 몇 주 전의 전투에서 쓰러졌고, 죽기 전 4중대의 지휘권을 그들의 챔피언에게 맡겼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한 번 더 캡틴을 잃었다.

 

 인원들이 시신을 옮길 때, 남은 한 명의 다크 엔젤이 라그나르에게 다가섰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맨얼굴을 드러낸 그의 태도엔 냉정함이 담겨있었다. 그의 아머에는 서전트의 표식만이 보였으나 거기엔 월계관과 의장용 볼트, 그리고 용맹, 사격술 등을 나타내는 자질구레한 장신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귀하의 위반행위는 그냥 넘길 수 없소.’ 그가 말했다.

 ‘그래서 내게 사과라도 바라는 건가?’ 라그나르의 얼굴에 거미줄처럼 맺혔던 고통은 그의 강화된 신체와 아머 내부의 조정기에서 주입된 전투용 마취제 덕분에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너희의 챔피언은 죽었다. 만일 그가 좀 더 숙련된 전사였다면, 여전히 이곳에 서 있었겠지. 하지만 그러지 못했을 뿐. 그게 전부야, 다크 엔젤.’

 

 다크 엔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동의보단 고찰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승리 조건은 누가 먼저 피를 흘리냐, 였소..’ 차갑고, 악의에 찬 이성으로 그가 말했다.

 

 ‘중요한가? 끝났다니까.’

 ‘그건 그렇지.’ 서전트가 동의했다. ‘그리고 귀하가 졌소, 지휘관 블랙메인.’

 

 늑대들의 무질서한 대열에서 야유와 고함치는 모욕이 터져 나왔지만 다크 엔젤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라그나르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광대뼈가 살짝 드러나 보였고, 그 모습을 확인한 그는 주억거렸다.

 

 ‘확실히, 승리조건은 누가 피를 흘리냐였지.’ 서전트가 되풀이했다. ‘그대가 먼저 흘렸고.’

 

 

 라그나르는 그의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그의 전사들이 다크 엔젤들에게 조롱을 던지고 있었는데, 다크 엔젤들은 그러한 원색적인 조롱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완벽한 침묵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이봐,’ 속삭임보다는 약간 더 큰 소리로, 라그나르가 말했다. ‘너희 챔피언의 죽음에는 나 또한 안타깝게 생각해, 진심으로. 하지만, 이만 물러나라 서전트, 이 이상은 문제만 생길 뿐이야.’

 ‘그렇지 않소, 울프 가드.’

 ‘눈이 삐어버린 건가? 우린 함께 싸웠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사촌이여. 자부심을 가질만큼! 지금이라도 떠난다면 우리의 그 영광됨에 혈흔과 후회를 묻히지 않을 수 있어.’

 

 열병식에 와있는 것처럼 한 팔에 그의 헬멧을 끼고 있던 서전트는, 베레겔트 호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의 입술이 오그라들었고, 그 속엔 그저 분노가 아닌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인 혐오감이 담겨있었다.

 

 ‘우리가 늑대들의 이빨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하오? 귀하는 규칙을 어겼고, 이에 자비를 구걸한 권리 따윈 없소. 피는 피를 부르는 법, 그게 전통이었지.’

 ‘네놈...우리와 진정 한판 붙어보자는 건가?’

 ‘소관의 의지는 중요치 않소, 울프 가드. 이건 소관과 관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귀하는 결투에서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를 패배시킨 전사를 불명예스럽게 베었소. 귀하는 마치 피에 굶주린 흡혈귀처럼 흥분했었으며, 우리 둘을 형제로서 묶어주던 선례의 전통을 깨버린 것이고, 끝내는 비열한 살인을 저질러 프라이마크 간의 의례를 훼손한 거요.’

 

 라그나르의 대답은 쉿쉿거리는, 뜨거운 입김이었다. ‘다음 말은 신중해야 할 거야, 다크 엔젤. 나는 모욕적인 말을 한 놈들의 입에서 혀를 잘라냈거든.’

 ‘귀하를 믿소.’ 서전트의 혐오감이 그의 두 눈에 닿자 전사의 완강한 시선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피는 피를 부를 것이오, 지휘관 블랙메인.’

 

 라그나르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순간의 무게감 밑에서도, 불신에 찬 웃음을 터뜨리지 않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심지어 그의 어깨에 중대하고 생생한 죄가 얹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배에서 우릴 협박하는 거야? 만물의 아버지의 뼈에 대고, 다크 엔젤, 내 형제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네놈들을 조각내버릴 수 있다는 걸 명심해. 벌써부터 마지막 숨을 내쉬라고 아우성이군. 네 같잖은 위협을 가지고 꺼질 수 있을 때 꺼져라. 더는 네놈들의 목숨을 장담해줄 수 없게 됐으니. ’

 ‘이건 위협이 아니오.’ 서전트가 말했다. ‘귀하야말로 우리를 협박하는군. 우리가 그대 머릿수의 두 배가량 많지 않았다면 위기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지. 귀하가 듈럼 에스티나스(Duellum Honestas)의 경계를 어겼으니, 나 또한 듈럼 돌로르(Duellum Dolor)로 도전하겠소.’

 ‘생사박투生死搏鬪?’

 

 라그나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개 서전트가 펜리스의 전투 지휘관에게, 그것도 죽을 때까지 싸우자고 한다고? 그의 뒤에 선 늑대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울부짖었다.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지휘관 블랙메인. 전쟁 의례에 따라, 귀하는 도전을 받아들이고 혈채血債를 지불할 때까지 30시간이 남았소.’

 ‘거절한다면?’

 ‘그럴 경우 귀하는 모든 명예를 박탈당하게 되겠지. 그리고 만일 그대가 혈채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다크 엔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늑대들에게서 그를 받아낼 것임을 알아두시오.’

 

 마취제는 노여움이 동반하는 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 이 두 세력 간의 깊어진 골을 되돌릴 방법이 있을거라 믿었다.

 아직 최악은 아니야. 진정해, 진정해, 스스로에게 되뇌였다. 침착해.

 

 ‘네가 날 어떤 방식으로 협박하든 간에, 난 너와 싸우지 않겠다, 서전트. 마지막으로 말한다, 이 배에서 떠나라.’

 

 다크 엔젤은 그의 헬멧을 착용했다. 그리고 가슴에 양손을 교차하며 아퀼라로 경례를 보였다. 헬멧의 구강 격자를 떠난 목소리는 비인간적이고 금속적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평온했다.

 

 ‘30시간이오, 늑대의 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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