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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세이드

망각의 속삭임 - 서

by 맥주수염 2021. 12. 9.

 

 천지가 개벽했다.

 

 이름 없는 이는 지금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지의 가죽이 뒤집히는 것도 보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면 벼락이 내리쳤고, 숨을 내쉴 때면 용암이 솟구쳤다.

 

 그는 꿈을 꾼다고 생각했지만, 몸통을 관통하는 거센 에너지의 소용돌이가 결코 그렇지않음을 반증했다. 어딘가 잘못 부딪혔는지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문제점을 인지하는 순간, 섬세하게 조율된 생체금속이 영민하게 반응하며 후순위로 밀려나있던 시각 회로의 손상을 초 단위가 넘어가기도 전에 복구시켰다.

 

 [...]

 

 그곳에 한 존재가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사고회로가 미친 듯이 경고를 보냈다. 증오, 분노. 느꼈다-는 건 더 이상 그들 네크론에게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는 이 같은 부정적인 사고가 그의 사고회로를 거쳐 사이버네틱 피질을 뒤덮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로서는 이를 제어할 수도, 할 생각도 없었다.

 

 란두고르, 살갗 벗기는 자, 눈꺼풀 없는 눈.

 

 -말락!

 

 이름이 불린 순간, 이름 없는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해냈다. 무엇을 해야하는 지도.

 

 번갯불처럼 튕겨져나간 말락이 우로스의 창대로 달려나갔다. 우주의 엔트로피를 제어하며 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그 기이한 장치는 무너져내린 대지의 구석에 누워있었다.

 

 [....네ㅁ..]

 

 그가 달려가는 사이, 공포를 모르는 불사자 군단이 을 향해 전진했다. 오랜 격전 끝에 왕조 특유의 황동빛은 검게 타버렸지만, 그들의 움직임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군단은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들의 두 눈동자는 여전히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살갗 벗기는 자가 손을 휘두르자 불길이 꺼졌다. 금속 육신 아래 일말이나마 남아있던 생기를 샅샅이 빨아먹힌 것처럼 군단은 맥없이 쓰러져버렸다. 이제 그들은 조금 특이한 모양새의 고철더미에 불과했다.

 

 말락의 뒤편에서 육중한 광자포가 발사되었다. 둠스데이 아크였다. 공기가 작열하고, 사이에 있던 장애물들을 흔적도 없이 태워버릴만한 위력이었으나 눈꺼풀 없는 눈은 그 광기에 찬 눈을 한 번 치켜뜨는 것으로 탑승자뿐만 아니라 아크가 있었다는 흔적마저 지워버렸다.

 

 덫 -우로스의 창대- 에 걸렸음에도 크탄이란 존재는 초월적이었다. 창대의 일부가 결국 녀석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말락이 창대를 재조정하기 위해선 시간이 더 필요했다.

 

 점차 밀려오는 에너지 파동이 거세져가는 가운데, 누군가 신의 등으로 뛰어들었다.

 

 막틀란 쿠트라크, 메이나크의 가장 위대한 네메소르이자 말락을 부른 이가 바로 그였다. 아무리 금속 육신을 입게 된 네크론이라지만 본능적으로 크탄의 앞에 서면, 특히나 이 끔찍하리만치 섬뜩한 란두고르 앞에 서면 이성적 사고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나 칠흑색 검과 빛의 지팡이를 휘두르는 그에겐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까와 같이 별의 신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말락은 막틀란의 몸 근처에 쳐진 반투막한 막을 볼 수 있었는데, 란두고르가 내뿜는 공포스러운 힘이 그 막에 닿는 순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역으로 네메소르가 휘두르는 검엔 놈에게 치명적인 에너지라도 담겨있는 듯 아까보다도 더 격렬하게 몸을 비틀어댔다. 눈먼 자의 작품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강대한 신의 힘을 온전히 받아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알려주는 것처럼 금세 막틀란은 위기에 처하게 됐다.

 

 절체절명의 순간.

 

 [............]

 

 이번에는 말락이 그의 이름을 불렀고, 우로스의 창대가 다시금 그 위용을 드러내며 우주의 장막을 찢고 빛을 쏟아내 별의 신을 태워버렸다.

 

 그와 함께 엄청난, 지금까지 밀려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실로 초신성이 타오르는 것 같은 에너지 파동이 터졌다. 마치 오벨리스크가 처박힌 듯한 타격을 받으며 말락은 자신의 금속 신체가 깃털보다 가볍게 날아가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원점으로 돌아왔다. 세상이 녹아내리고 있었고, 말락의 시야는 흐릿했다. 게다가 이번엔 완벽한 정적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손상이 심각했다.

 

 하지만 그는 자가수리 프로토콜을 활성화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에너지의 해일이라고 표현할 법한 그것은 섬세하게 조율된 지배계급의 생체금속으로도 회생시키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히 파괴해버렸다.

 

 말락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고개를 들었다.

 

 청각을 담당하는 회로가 파손되어 돌부스러기 흩날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으나, 그는 놈이 내지르는 단말마를 들을 수 있었다. 모멸적인 당혹성, 신의 비명소리 그리고 저주.

 

 만족스럽군.

 

 별의 신의 죽음을 뒤로, 말락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네메소르 말락!]

 

 그의 이름이 불린 순간, 말락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피웅덩이 위에 서있었다. ‘인류라 정의된 열등종의 청소가 막 끝난 참이었다. 영겁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가 파묻혀있던 행성은 별 볼일이 없는 행성이었는지 멋도 모르고 메이나크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던 해충들은 변변찮은 저항도 못한 채 쓸려나갔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이고 있던 터라 이미 쇠할대로 쇠한 참이었으나 말락은 구태어 그 점을 짚진 않았다. 그는 지금 기억 회로와 사고 회로, 그리고 인지 회로가 엉켜 툭하면 육천만 년 전으로 돌아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굳이 필요 없는 사고를 추가하고 싶진 않았다.

 

 “네메소르 말락, 그대의 뜻대로 행성 내 잔류 열등종의 박멸이 곧 끝날 겁니다.”

 “토홀크, 눈먼 자여. 왜 우리가 이 행성에서 동면에 들어갔던 것이지? 이 땅은 우리의 영토가 아니었다.”

“.....”

 

 말락은 혼란스러웠다. 그의 마지막 기억은 크탄 란두고르를 살해하던 그 순간인데 왜 그가 여기 있는 것인지. 손상은 어찌 된 것이지?

 

 무엇보다도 그를 혼란스럽게하는 것은 그가 겪어온 과정은 기억회로에 저장되어있지 않지만, 정작 그가 대동면에 들어갔다는 것과 깨어난 이후 무엇을 해야하는 지는 저장되어있다는 점이었다. 이 모순된 사실에, 말락은 분노마저 느꼈다.

 

 문득, 말락은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조잡한 기술력으로 벼려진 왕관이었다. 이 또한 기억회로에 없는 것을 보니 과거에 빠져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챙겨온 것 같았다.

 

 그의 이성적 사고 회로는 당장이라도 그것을 던져버릴 것을 권하고 있었으나, 그는 쉽사리 따르지 못했다. 반쯤 깨져버린 뒷부분과 텅 빈 눈동자 사이로 웅덩이에 비친 붉은 모습의 그가 보였다.

 

 “해당 질문에는 이 우둔한 자로선 명확한 답을 낼 수가 없습니다. 다만 툼월드가 지휘계층을 깨운 이유는 파악되었습니다. 설정된 위험 수준이 넘어갔습니다.”

 “이해가 안되는군. 이 자들은 우릴 위협할만한 기술력을 갖추지 못했어.”

 

 본체와 불필요한 부분까지 닮은 이 가짜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눈구멍을 말락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길게 갈라진 상처투성이의 하늘에서 일그러진 유성우가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분명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그 어떤 것도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지 않는 지금, 말락은 이 사태를 해결할 단 하나의 확고부동한 답을 스스로 도출해냈다.

 

 “군단을 일깨워라.”

 

 결국 이 냉혹한 우주는 전쟁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길게 뻗은 조잡한 형태의 왕관을 차가운 금속 얼굴에 씌우며 말락은 사고했다. 그의 몸과 기억은 부서져 제 조각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상관없었다. 철저하게 검의 논리를 따를 뿐.

 

 나는 깨부숴진 자요, 벌거숭이왕일지니. 곧 망각의 속삭임이리라.

 

 오랜 격언을 읊조리며, 격변해버린 우주에서 눈을 뜬 부서진 자가 전쟁에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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